<허무에의 공물> 이 너무 약발이 강해서 그 이후론 도저히 다른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온다 리쿠를 읽어도, 독자의 감성을 은근히 얕보면서 눈치를 보는 듯한 설의법, 가정법의 서술에 답답함과 짜증을 느낄 지경이다.
그러고 보면 리쿠쨔마는 다분히 감상적인 문장을 갖고 있다. 내가 리쿠쨔마를 좋아하는 것은, 그러나, 감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상적이지만은 않기 때문” 이다. 온다 리쿠에게는 소녀만화적인 간지러운 감상주의와 함께 남성적 냉철함이 있다. 어딜 보면 어이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유치한데, 어딜 보면 세상 물정에 좀 부디껴 본 아줌마 같은 세속적인 냄새가 난다.
첫눈의 인상만으론 소녀적임, 어딘가 폐쇄적이고 유치함이라는 부분이 눈에 띄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반대의 속성이 드러난다. 이런 양가성은 내가 매우 좋아하는 것이다. 랄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양가성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단면적인 것, 단순한 것은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경멸하기까지도 한다.
특히, 자기 안에 양가성을 갖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 좋다. 소설이든 뭐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항항 비정형으로 파악하고 현재와 가능성을 동시에 구현하려는 듯한, 혼자서 완결된 듯 하면서 절대 자기도취에 빠지는 일 없이 냉정하고 시니컬하기까지 한 시선을 유지하는 그런 작품을 사랑한다.
자기도취에 빠진 단순한 것ㅡ이게 내가 경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멸의 감각을 맛보게 해준 작품들은 이제껏 여러 가지 있었을 테지만,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래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 기억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더더욱 머릿속에 저장해 둘 이유가 없다.
쿠스모토 마키의 <K의 장렬>은 반대로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특히 그 라스트의 한줄(대사)가 굉장했다. K의 장렬은 K라고 불리는 '아름다움'을,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추구한다는 이야기를, 우의적으로 비틀어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K라는 인물이 곧 이야기 자신의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누구보다도 K에게 집착하고 있던 한 소녀가 “K따윈 마약중독자일 뿐이지” 라며 그를 차갑게 깎아내리고 있다.
이 시니컬한 대사는 작품을 감도는 허무함, 덧없고 퇴폐적인 분위기와 실로 완벽하게 부응한다. 깊이있는 무엇만이 갖는 여운이 이 대사로 인해 울리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작품은 우스꽝스런 자기도취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난다.
같은 맥락에서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 속 몰락한 히사코의 출연 또한 뛰어난 한수였다고 생각한다. 히사코 또한 뛰어난 아름다움과 사악함을 가진 '추구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플롯ㅡ아니 '월드' 그 자체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는 너무나도 왜소한 모습으로 독자의 눈앞에 출현한다. 우리가 찾던 것은 뭐였지? 우리가 원하던 아름다움, 사악함은 어디에 갔지? 독자의 눈에 현기증이 덮친다. 그러나... 내가 찾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불안한 현기증을 겪음으로써 더욱 완전해진다.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도, 그것을 향유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좀 멋 없는 설명으로 심리적 방어기제로서의 자기부정 같은 것을 들먹이는 것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상관없다. 자기부정은 복숭아에 뿌려진 한줌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온다 리쿠를 “탐미적” 이라 형용하기에는 그야말로 적잖은 심리적 저항이 따른다. 분명 소재를 따지고 보면 탐미적으로 보일 만한 작품이 많다. <삼월> 시리즈, 특히 <보리바다> <황혼백합>은 고딕 로망의 무대에 퇴폐적이고 나른하면서도 잔혹한 이야기를 자아내고 있다. <굽이치는 강가에서> 역시 젊음과 잔혹함의 이야기다. 미소년 미소녀의 전면 배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탐미적이라 하기에는 무리다. 어째서일까.
설명이 될 순 없지만, 나는 <탐미적인 소설>의 조건 중 하나로 “경질의 문장” 을 꼽고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팬들이 보면 기절할 얘기일지도 모르나 문장이 딱딱하지 않으면, 그다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참 기이한 이야기다.
꼭 경질이 아니더라도, 서정적이기보다는 이지적, 감성적이기보다는 냉철하고, 우유한 것보다는 예리한 문장이 '탐미적'이다. 이렇게 쓰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탐미적' 문장의 정의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이게 앞서 말한 '양가성'에 대한 취향과 부합되는 이야기다.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고전적 정의대로, 관조에 의해 향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미적 관조라는 것은, 어느정도 자신과 가까운 대상을ㅡ감정 이입이나 투사 등에 의해ㅡ, 되도록 차갑고 냉엄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즉 시선의 양적 거리는 가깝고, 그 질은 차갑고 딱딱한 것. 가까움의 개념은 곧잘 따뜻함의 개념과 묶이는 바, 가깝고-차갑다는 것은 일종의 되다만 모순형용이랄 수 있겠으니, 그런 의미에서 가까우면서 차가운 시선이 내재된 작품은 양가적인 것이며 탐미적 독서체험에 알맞다.
온다 리쿠의 문장은 뭐랄까 지나치게 따스하다. 게다가 수다스럽다. 리쿠쨔마는 미적 대상을 냉정하게 묘사한다기보다는 그것에 관한 인물의 심정을 묘사하고 "맞아 맞아" 라는 독자의 동의를 요구한다. 이것은 탐미적이기엔 너무 노골적인 태도다.
내가 온다 소설 중 가장 '탐미적'으로 치는 것은 <굽이치는 강가> 와 <보리바다> 를 제치고 왠지 <여름의 마지막 장미>다. 내가 읽은 온다 소설 중에서는 가장 '차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뭐라고 할까, 이건 문장 자체의 성향이 변한 거라기보다는, 이야기가 다루는 소재 때문 인 것 같다. 군데군데 삽입된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사실 로브-그리예의 소설 일부다), 설산의 클로즈드 서클인 오래된 호텔, 불온하고 퇴폐적인 비밀을 감춘 아름다운 인물들, 그들의 과거를 고발하는 고딕 호러 테이스트의 사물들. 일단 '청춘'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그만큼 '청춘의 공감' 혹은 '추억'과는 거리가 멀다. 삽입된 로브-그리예의 문장들은 이질적인 매력을 배가시킨다. 테마 면에서도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수수께끼화하는ㅡ수수께끼의 '해결'을 목적에 두지 않고 수수께끼 그 자체를 추구하는 그런 성질을 가지며, 라스트의 처리는 쓸쓸하고 품위 있는 '환멸'의 이미지다.
온다 리쿠가 좀 더 폐쇄적이고 경질로, 속세 초월한 듯 현학과 교양을 늘어놓았다면, 아마 미나가와 히로코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의 문장도 대단히 경질, 마치 흑백영화 같고, 조근조근한 어조로 술술 읽히는 온다 리쿠와 비교하면 참 낯선 리듬을 갖고 있다. 배타적이라고나 할까, 자기완결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비극적이고 독기와 향기에 충만해서 읽고 있으면 취한다.
<허무에의 공물> 같은 경우는 이지적인 문장이면서, 세태소설 같은 저속한 표현과 사투리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탐미적인 부분은 혀를 내두를 만큼 절품이라 나 같은 일어 초보 외국인까지 매료된다. 몇 번 히누마 소지에 대한 기술이나 <미치광이 다과회> 장면을 번역해 봤지만, 다른 부분들ㅡ예를 들어 첫부분, 마지막 부분 같은 곳은 정말 대단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위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문장들이 환기하는 이미지 때문에 나는 가슴을 쥐고 펑펑 울고 말았다. 시크한 척 하지만 내 감성은 사실 좀 전근대적이고 로맨틱하다. 특히 <검은 그림자> 가 되어 쓸쓸히 서 있는 소지가 배웅을 하듯ㅡ혹은 극의 끝을 고하듯 커튼을 닫는 그림은 정말로 아름답다. 독자평 중에는 이 것을 두고 <일본 미스터리 사상 굴지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는 것도 있다.
반면 나는 대놓고 "아름답다" 는 형용이 빈번한 문장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은, 그것 자체의 발음부터가 예쁘니까 적절히 삽입되어 있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등장 인물의 외모 따윌 지치지도 않고 어떻게 예쁘네 우아하네 나불나불 늘어놓는 건 짜증이 난다.
내가 야오이소설을 잘 못 읽는 건 이런 이유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정말로 뭐에 홀린 듯이 우케의 미모를 줄줄 늘어놓는데, 읽는 쪽은 엄청난 고역이다.
그런가 하면 정철의 시가나 춘향전 같은 구비문학에서 이야기되는 미적 형용의 폭포 같은 거라면 이쪽에서도 환영이다. 갖은 수사법과 운율이 동원된 이들의 묘사문을 읽고 있으면 절로 흥이 난다(단지 이런 과잉은 탐미적이라기엔 비극성이 부족하다. 오히려 희극적이다). 하지만 야오이소설 등에서의 묘사는 이만한 다채로움도 운율도 없다.
<허무에의 공물> 은 산문이지만 읽다 보면 미묘한 운율감이 느껴지고, 그것이 또 매끄럽고 차가운 비단 같은 감촉이라 빠져든다. 독자평을 찾아보면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추리)소설이란 극히 희귀하나 이 책만은" 이라고 고백하는 독자가 많다. 나는 벌써부터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리쿠쨔마는 다분히 감상적인 문장을 갖고 있다. 내가 리쿠쨔마를 좋아하는 것은, 그러나, 감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상적이지만은 않기 때문” 이다. 온다 리쿠에게는 소녀만화적인 간지러운 감상주의와 함께 남성적 냉철함이 있다. 어딜 보면 어이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유치한데, 어딜 보면 세상 물정에 좀 부디껴 본 아줌마 같은 세속적인 냄새가 난다.
첫눈의 인상만으론 소녀적임, 어딘가 폐쇄적이고 유치함이라는 부분이 눈에 띄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반대의 속성이 드러난다. 이런 양가성은 내가 매우 좋아하는 것이다. 랄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양가성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단면적인 것, 단순한 것은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경멸하기까지도 한다.
특히, 자기 안에 양가성을 갖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 좋다. 소설이든 뭐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항항 비정형으로 파악하고 현재와 가능성을 동시에 구현하려는 듯한, 혼자서 완결된 듯 하면서 절대 자기도취에 빠지는 일 없이 냉정하고 시니컬하기까지 한 시선을 유지하는 그런 작품을 사랑한다.
자기도취에 빠진 단순한 것ㅡ이게 내가 경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멸의 감각을 맛보게 해준 작품들은 이제껏 여러 가지 있었을 테지만,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래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 기억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더더욱 머릿속에 저장해 둘 이유가 없다.
쿠스모토 마키의 <K의 장렬>은 반대로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특히 그 라스트의 한줄(대사)가 굉장했다. K의 장렬은 K라고 불리는 '아름다움'을,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추구한다는 이야기를, 우의적으로 비틀어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K라는 인물이 곧 이야기 자신의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누구보다도 K에게 집착하고 있던 한 소녀가 “K따윈 마약중독자일 뿐이지” 라며 그를 차갑게 깎아내리고 있다.
이 시니컬한 대사는 작품을 감도는 허무함, 덧없고 퇴폐적인 분위기와 실로 완벽하게 부응한다. 깊이있는 무엇만이 갖는 여운이 이 대사로 인해 울리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작품은 우스꽝스런 자기도취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난다.
같은 맥락에서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 속 몰락한 히사코의 출연 또한 뛰어난 한수였다고 생각한다. 히사코 또한 뛰어난 아름다움과 사악함을 가진 '추구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플롯ㅡ아니 '월드' 그 자체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는 너무나도 왜소한 모습으로 독자의 눈앞에 출현한다. 우리가 찾던 것은 뭐였지? 우리가 원하던 아름다움, 사악함은 어디에 갔지? 독자의 눈에 현기증이 덮친다. 그러나... 내가 찾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불안한 현기증을 겪음으로써 더욱 완전해진다.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도, 그것을 향유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좀 멋 없는 설명으로 심리적 방어기제로서의 자기부정 같은 것을 들먹이는 것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상관없다. 자기부정은 복숭아에 뿌려진 한줌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온다 리쿠를 “탐미적” 이라 형용하기에는 그야말로 적잖은 심리적 저항이 따른다. 분명 소재를 따지고 보면 탐미적으로 보일 만한 작품이 많다. <삼월> 시리즈, 특히 <보리바다> <황혼백합>은 고딕 로망의 무대에 퇴폐적이고 나른하면서도 잔혹한 이야기를 자아내고 있다. <굽이치는 강가에서> 역시 젊음과 잔혹함의 이야기다. 미소년 미소녀의 전면 배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탐미적이라 하기에는 무리다. 어째서일까.
설명이 될 순 없지만, 나는 <탐미적인 소설>의 조건 중 하나로 “경질의 문장” 을 꼽고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팬들이 보면 기절할 얘기일지도 모르나 문장이 딱딱하지 않으면, 그다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참 기이한 이야기다.
꼭 경질이 아니더라도, 서정적이기보다는 이지적, 감성적이기보다는 냉철하고, 우유한 것보다는 예리한 문장이 '탐미적'이다. 이렇게 쓰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탐미적' 문장의 정의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이게 앞서 말한 '양가성'에 대한 취향과 부합되는 이야기다.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고전적 정의대로, 관조에 의해 향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미적 관조라는 것은, 어느정도 자신과 가까운 대상을ㅡ감정 이입이나 투사 등에 의해ㅡ, 되도록 차갑고 냉엄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즉 시선의 양적 거리는 가깝고, 그 질은 차갑고 딱딱한 것. 가까움의 개념은 곧잘 따뜻함의 개념과 묶이는 바, 가깝고-차갑다는 것은 일종의 되다만 모순형용이랄 수 있겠으니, 그런 의미에서 가까우면서 차가운 시선이 내재된 작품은 양가적인 것이며 탐미적 독서체험에 알맞다.
온다 리쿠의 문장은 뭐랄까 지나치게 따스하다. 게다가 수다스럽다. 리쿠쨔마는 미적 대상을 냉정하게 묘사한다기보다는 그것에 관한 인물의 심정을 묘사하고 "맞아 맞아" 라는 독자의 동의를 요구한다. 이것은 탐미적이기엔 너무 노골적인 태도다.
내가 온다 소설 중 가장 '탐미적'으로 치는 것은 <굽이치는 강가> 와 <보리바다> 를 제치고 왠지 <여름의 마지막 장미>다. 내가 읽은 온다 소설 중에서는 가장 '차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뭐라고 할까, 이건 문장 자체의 성향이 변한 거라기보다는, 이야기가 다루는 소재 때문 인 것 같다. 군데군데 삽입된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사실 로브-그리예의 소설 일부다), 설산의 클로즈드 서클인 오래된 호텔, 불온하고 퇴폐적인 비밀을 감춘 아름다운 인물들, 그들의 과거를 고발하는 고딕 호러 테이스트의 사물들. 일단 '청춘'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그만큼 '청춘의 공감' 혹은 '추억'과는 거리가 멀다. 삽입된 로브-그리예의 문장들은 이질적인 매력을 배가시킨다. 테마 면에서도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수수께끼화하는ㅡ수수께끼의 '해결'을 목적에 두지 않고 수수께끼 그 자체를 추구하는 그런 성질을 가지며, 라스트의 처리는 쓸쓸하고 품위 있는 '환멸'의 이미지다.
온다 리쿠가 좀 더 폐쇄적이고 경질로, 속세 초월한 듯 현학과 교양을 늘어놓았다면, 아마 미나가와 히로코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의 문장도 대단히 경질, 마치 흑백영화 같고, 조근조근한 어조로 술술 읽히는 온다 리쿠와 비교하면 참 낯선 리듬을 갖고 있다. 배타적이라고나 할까, 자기완결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비극적이고 독기와 향기에 충만해서 읽고 있으면 취한다.
<허무에의 공물> 같은 경우는 이지적인 문장이면서, 세태소설 같은 저속한 표현과 사투리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탐미적인 부분은 혀를 내두를 만큼 절품이라 나 같은 일어 초보 외국인까지 매료된다. 몇 번 히누마 소지에 대한 기술이나 <미치광이 다과회> 장면을 번역해 봤지만, 다른 부분들ㅡ예를 들어 첫부분, 마지막 부분 같은 곳은 정말 대단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いつもの神社の前までくると、二人はいっせいに牟礼田の家を見上げた。ガラス戸のところに立って、こちらを見おろしているのは、蒼司だといい切れるほどにはっきりはしないが、確かに牟礼田ではない。それでは蒼司はやはりあの家にいて、いましがたの喪服パーティの模様も、陰できいていたのだろうか。いまあそこに立っているのが、本当に彼だとするなら、駆け寄って一度握手をしたい気がする。なんとか見定めようとするうちにその黒い影は、別れをいうように手をのばして、カーテンの飾り紐を引いた。
朱いろから橙いろに薄れかかった夕日をその上にあてどなく漂わせながら、辛しいろのカーテンは、そのとき、わずかにそよいだ。小さな痙攣めいた動きがすばやく走りぬけると、やおら身を翻すようにゆるく波を打って、少しずつ左右からとざされてゆき、立ちくす黒い影を、いま、まったく隠し終った。
위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문장들이 환기하는 이미지 때문에 나는 가슴을 쥐고 펑펑 울고 말았다. 시크한 척 하지만 내 감성은 사실 좀 전근대적이고 로맨틱하다. 특히 <검은 그림자> 가 되어 쓸쓸히 서 있는 소지가 배웅을 하듯ㅡ혹은 극의 끝을 고하듯 커튼을 닫는 그림은 정말로 아름답다. 독자평 중에는 이 것을 두고 <일본 미스터리 사상 굴지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는 것도 있다.
반면 나는 대놓고 "아름답다" 는 형용이 빈번한 문장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은, 그것 자체의 발음부터가 예쁘니까 적절히 삽입되어 있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등장 인물의 외모 따윌 지치지도 않고 어떻게 예쁘네 우아하네 나불나불 늘어놓는 건 짜증이 난다.
내가 야오이소설을 잘 못 읽는 건 이런 이유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정말로 뭐에 홀린 듯이 우케의 미모를 줄줄 늘어놓는데, 읽는 쪽은 엄청난 고역이다.
그런가 하면 정철의 시가나 춘향전 같은 구비문학에서 이야기되는 미적 형용의 폭포 같은 거라면 이쪽에서도 환영이다. 갖은 수사법과 운율이 동원된 이들의 묘사문을 읽고 있으면 절로 흥이 난다(단지 이런 과잉은 탐미적이라기엔 비극성이 부족하다. 오히려 희극적이다). 하지만 야오이소설 등에서의 묘사는 이만한 다채로움도 운율도 없다.
<허무에의 공물> 은 산문이지만 읽다 보면 미묘한 운율감이 느껴지고, 그것이 또 매끄럽고 차가운 비단 같은 감촉이라 빠져든다. 독자평을 찾아보면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추리)소설이란 극히 희귀하나 이 책만은" 이라고 고백하는 독자가 많다. 나는 벌써부터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