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개월 전에 읽은 책이다.
날이 얼어붙을 듯이 춥다. 추위 때문인가, 오늘 아침 공기에 무언가 눈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쇠 냄새와 약간 비슷하지만 아주 청명한 냄새였다. 그 냄새를 맡자 이 책이 생각났다.
사쿠라바 가즈키의 2006년 작품으로, 한겨울이 아닌 6월 하순에 나왔다.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이형의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나나카마도와 그녀와 너무나도 닮은 소년 유키카제,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예전에 [내 남자]를 읽을 때는 [나나카마도]가 그것의 습작 같은 소설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 정도로 두 작품의 구조나 분위기는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러나 나나카마도를 다른 쪽의 '연습'이라고 격하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뭐랄까 너무 '오롯하다', 고 할까, 어떤 점에선 내 남자보다 뛰어나다.
요약할 만한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다. 이 작품은 스토리 중심의 작품은 아니다. 요즘의 라이트노벨 형 작품들이 갖는 경향대로 정밀하고 빼곡한 이야기보다는 어떤 '하나의 세계'를,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 느낌만큼은 전해 주려고 하는 동기로부터 나온 작품인 듯하다(그렇다고 라노베도 아니지만).
그 세계란 소설 속의 표현대로 '나나카마도 월드'다. 소녀 나나카마도는 '이형'이라고 자조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철도 오타쿠'다. 그녀와 꼭 빼닮은 미소년 유키카제 역시 그렇다. 그들은 모형 기차를 늘어놓고 작은 레일로 둘러싸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나나카마도가 모형 철도로 만든 "나나카마도 월드"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홋카이도 시골마을(명칭이 나왔었나...) 그 자체의 상징이다. 그곳은 인물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현실적인 공간임과 동시에 일종의 '네버랜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나나카마도와 유키카제와 같은 소년소녀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순애, 외면하고 싶은 핏줄의 진실이 유예되고 덮인 채, 어린아이 소꿉 장난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네버랜드. 나나카마도의 어머니인 유우나에게는, 성장하고 싶지 않은 미숙한 자아가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없는 곳'으로서의 네버랜드. 그러나 소녀 나나카마도는 이야기의 끝에 '네버랜드'를 떠나고, 그녀의 어머니는 오랜 방랑을 마치고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읽으면 [소녀 나나카마도]라는 소설은 인물들이 자신만의 '장난감 레일로 이루어진 폐쇄된 세계'를 벗어나 성장해야만 하는 필연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무대 세팅만으로 핵심을 말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작품도 그렇다. 이 신비로운 홋카이도의 시골 마을의 정경에는 이미 어린아이와 어른, 늦됨과 성장 같은 작품의 테마가 녹아들어가 있다. 그들이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안주하는 '마을' 은 곧 이야기의 '세계' 그 자체다.
이 '세계'는 텍스트 구조적으로는 장마다 화자가 바뀌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나카마도의 어머니 유우나의 나레이션은 장 표시 없이 구분되어 책의 처음과 6장 뒤에 배치되었다. 전 7장으로, 화자는 나나카마도, 유키카제, 유키카제의 어머니, 심지어는 나나카마도의 집에 들어온 퇴임 경찰견(수컷)까지 맡는다. 시간을 역행하지는 않지만 [내 남자]와 아주 유사한 방식이다.
[내 남자]와 유사한 것은 여러 차원에 걸쳐 많은데, 그 중에서도 소재 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근친간의 사랑이라는 테마와, "아름답지만 누추한 남자"다 (소설 어느 쪽에 나온 표현은 아니다. [내 남자] 에서는 '아버지' 준고에 대해 '우아하지만 어딘가 초라한 남자'라고 형용한다). 유키카제의 아버지가 딱 그런 타입으로, '봐 줄 건 외모 뿐'인 생활력 제로의 한심한 아저씨다. 그의 부인인 다키는 남편을 '바보'라고 매도하면서도 그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아름다우니까, 다.
아름답고, 누추한 남자, 라고 하는 것은 매우 탐미적인 소재다. 그건 그야말로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 이외의 용도엔 별 쓸모가 없다. 게다가 매우 환상적인, 잡히지 않는 존재다. '아름답지만 초라한 여자' 라는 표현은 그 즉시 여러가지 보이지 않는 설명문을 주렁주렁 달게 된다. 게다가 그자체가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런 여자라면 드라마에서라도 줄기차게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남자, 라는 경우에는, 신기하게도 막연하고 형용할 수 없는 감상이 밀려든다.
여기에서 '아름답고 누추한 남자'라는 것이 갖는 아름다움은 이 소설 전편에 감도는 기묘한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하는지도 모른다. [내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배경의 자연경관에 대한 묘사는 시적인 우아함과 박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물론 누차 말했듯이 한정된 세계이며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말하자면 '고작' 애가 어른 되는 작디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색채 감각 풍부한 필치로 묘사되는 날씨, 풍경, 소품 등은 필연의 운명을, '유한한 인간'을 돌이키는 무언가 거대한 것을 암시하는 장치로써 승화되어, 그 '작은 이야기'를 보석처럼 반짝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눈 쌓인 마가목에 매달려 겨울 바람을 맞는 빨간 열매. 이것은 곧 '나나카마도'와 '유키카제'의 폐쇄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어찌나 '아름답지만 초라한 사물'! 아니, 초라하지만 엄숙한 아름다움!
개개의 이미지즘 뿐 아니라, 이 작품은 글줄 자체가 기이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다. 순전히 일본어로 읽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책 중의 하나다.
책의 첫머리는 <쓰지기리처럼>이라는 부제로 시작되는데, 옮겨보면
쓰지기리처럼 사내질하고 싶구나, 라고 생각했다. 어느 아침 갑자기. 그리고 사미다레 맞는 것처럼 흠뻑 젖어 마음의 모양을 바꾸고 싶다.
정도가 된다. '쓰지기리'는 옛날 막부시대의 무사가 칼을 시험하기 위해 길가던 행인을 베는 일, 이라고 하고, '사미다레'는 오월우라고 쓰고 보통 '장맛비'로 번역된다. 물론 어떻게 번역을 하건 원문의 맛은 살아나지 않는다. '사내질'이라고 쓴 '오토코아소비'도 번역어를 선택할 여지가 많고(*처음에는 '남자놀음'이라고 썼다가 수정했다. 어감상은 이쪽이 더 좋다...), 심지어 '~구나' '~다'라고 쓴 어미조차 원문의 맛을 살리기 어렵다.
번역어의 문제만이 아니라, 반점(、)을 찍는 리듬도 절묘해서, 결벽증적으로 쉼표를 기피하는 요즘 우리 글의 추세로는 살리기가 상당히 어렵다. 아니 다 살린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을 터이다.
소설적 배경 설정이 갖는 핵심을 찌르는 힘과 마찬가지로 텍스트차원의 서술방식도 이 책의 "아름다운 분위기"를 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데, 과연 어떻게 번역을 해야 그 점을 충실히 재현할 수 있을까. 어차피 '번역'이라는 조건이 붙는 시점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걸까.

'유키카제'와 '나나카마도의 열매'. 출처 : 김선균기자의 빛으로 그린 세상
태그 : 탐미


덧글
스무스코코 2008/12/07 14:37 # 답글
쓰지기리처럼 사내질하고 싶구나, 에서 뭔가 꿰뚫려버렸습니다! 밸리를 통해 들어왔는데 블로그에 멋진 글이 많네요. 링크 추가해도 될까요'-'
츠쿠모쥬쿠 2008/12/07 17:33 #
안녕하세용~ 반갑습니다. 이곳엔 멋진 글보단 메롱스런 글이 훨씬 많지만(...) 링크는 언제나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