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착임하고 2주 정도 지났다.
카톨릭만이 세계 유일의 보편적 진리다. 그 흔들림 없는 신념을 바탕으로 선교사들은 60여년 전 할 수 없이 개국당한 이 섬나라에도 그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몰려와, 수부(首府)를 시작으로 몇 개의 도시에 학원을 개설했다. 혼을 정복하면 영토도 정복할 수 있다.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철이 들고부터 그는 교회에 혐오감밖에 갖지 못했다. 동양의 섬나라에 부임한 것도 포교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다.
이 학원은 창립 이래 30여년 지났으나 카톨릭 신앙은 생도에게 전혀 침투되지 않았다. 부유한 부모가 딸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다니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양갓집 자녀가 모일 뿐이라 생도들은 지극히 예의 방정했다. 그 순종에 짜증이 날 정도다. 채찍으로 위협하는 것도 정기적으로 손찌검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그 대신 이렇다 할 만큼 빠릿빠릿하지도 않다. 초등부에서 올라와 중등부 3학년이 된 자라면 주에 한번이라 해도 오년간 회화를 배워왔을 텐데, 유창히 말할 줄 아는 자는 한 명도 없다. 더듬더듬 어설픈 말을 상대하는 데엔 참을성이 필요하다.
고국에 있을 때 그는 참을성이 강했다. 이 나라에서는 참을 필요가 없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한다. 생도는 위축되고, 그는 더더욱 짜증이 쌓인다.
이것이 헐리우드 식 영화라면 뭔가를 계기로 생도의 마음을 사로잡고, 모두가 행복한 기분이 되어 이야기가 끝날 테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게 풀려 주지 않는다.
오늘 그가 가르친 클래스는 초등부 6학년이었다. 5학년 때 기이의 수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이해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종업 종이 울렸다. “기립” 반장의 구호에 생도들은 얌전히 일어났다. “경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바로” 로 고개를 든다. 교사에게 예의를 철저히 하므로 그가 불쾌해 할 이유가 없었지만, 속이 뒤집힌다. 이 나라의 방식을 강요당하는 것 같아서이리라. 호령에 일제히 행동하다니, 완전히 군대 아닌가.
“거기 자네, 잠깐.” 교실을 나서는 생도 한명을 그는 불러세웠다. 생도는 우아하게 멈춰섰다.
왜 불러세워 버렸을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이 의아했다. 어떤 아이라도 똑같아 보이는데 그 소녀만이 모노크롬 사진 속에서 혼자만 채색된 것처럼 두드러졌던 것이다. 어디에 눈코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란 아이들과 달리, 그 노녀는 색이 하얗고 눈매가 또렷했다. 콧날도 날렵하게 높은 편이었다. 이 나라 인간치고는, 이라는 보류가 붙지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도 된다.”
자세를 고치며 그렇게 말하자,
“Adieu.” 사랑스런 생도는 깨끗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틀려. Au revoir.”
“아뇨. Adieu.” 소녀가 부정했다.
“Adieu는 아주 오래 헤어질 때 써.” 그는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발음하며 설명했다.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을 때의 말이다. 평소 인사는 Au revoir.”
통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자,
“저는 곧 없어집니다” 소녀가 매끄럽게 말했다. “그러니 저는 말합니다. Adieu.”
“전학 가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거 유감이구나. 자네는 정말 회화가 능숙해. 마치 내 나라의 여자아이와 대화하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소녀는 왼발을 살짝 뒤로 빼고 무릎을 가볍게 굽혀 인사했다. 이 나라의 인사와는 다른, 그의 나라의 몸짓이었다. 그 사랑스러움에 소녀를 안고 싶어졌으나 참았다. 이 나라의 아이들은 ――아이들에 한하지 않고 누구라도―― 신체접촉을 몹시 싫어한다. 경솔하게 껴안았다가 추문의 원인이 될지 모른다. 볼에 가볍게 손을 대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래도 소녀는 어렴풋이 몸을 뺐다.
“왜 전학하는 건가?”
조금이라도 오래 소녀와 이야기하고 싶어 그는 화제를 찾아 그렇게 물었다.
부친의 직업 관계인가. 아니면 몸 상태가 나빠서 요양을 위해 전교하는 건가.
말베…라고 말하다가 소녀는 망설였다. 정확한 단어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이.
“말벨랑스(惡意)?”
“네. 그것이 강해서, 저는 전학 갑니다. 저는 무섭습니다.”
아무래도 불온한 말이다. 더 듣고자 했지만 소녀는 재빨리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듀, 무슈 사망” 이라는 목소리만이 그의 귀에 남았다.
그는 숙소로 돌아왔다.
가지를 뻗은 넝쿨장미가 걷는 길을 방해했다. 명령했는데도 아직 가지치기를 하지 않았다. 치우려고 하다가 왼손등을 예리하게 가시로 긁혔다. 뿜어나오는 피를 손수건으로 누르고 거실로 들어갔다.
로코코 풍 거울에 기이의 얼굴이 비친 듯한 착각이 일순 들었다. 야윈 뺨에 움푹 들어간 눈이 커다랗게 번뜩인다. 높고 날카로운 콧대는 반쯤 구부러져 있다.
거울 앞으로 그는 걸어갔다. 비치는 것은 머리가 세고 푸석푸석한 그 자신의 보잘것없는 모습이었다.
왜 짜증이 나는지는 알고 있다. 기이의 죽음에 대해 물어보려 해도 그의 모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자가 없다. 그 말고도 텍스트를 준비해서 읽고 쓰기와 문법을 가르치는 교사도 몇 명 있지만 모두 이 나라의 인간이다. 회화가 되면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게다가 기이의 죽음을 화제 삼으려 하면 말이 안 통한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는 전문부 수업이 없으므로 미나모라는 생도와 그 이래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얼굴을 명료하게 떠올릴 수 없었다. 미나모라는 것이 성인지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럴듯한 생도를 한명씩 붙잡아 네가 ‘미나모’인가 묻고 돌아다니고 싶지만, 교감이 정규 수업 이외에 생도와 개인적으로 친해지지 않도록 못을 박아두었다. 교감은 종이에 쓰인 금기사항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기이 로스탕은 전문부의 생도에게도 과외수업을 하고 있었다고 미나모는 말하지 않았던가……. 교장 자신은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질문도 못하고 불복을 외칠 수도 없었다.
살해당했다는, 생도들 사이에서의 소문. 밑도 끝도 없는 헛소문인가. 그렇게 의심하고픈 이유가 있는 건가.
원인불명의 돌연사. 한눈에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만한 상태라면 그렇게 발표한 후 규명 역시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학원측으로서는 가능한 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겠지. 검시가 행해졌다고 해도 대강대강이 아니었을까. 이 나라의 경찰을 그는 아직 신용하지 못했다. 아시아는 미개하다는 생각이 강하다.
심장마비란 편리한 말이다. 죽음이란 즉 심장의 기능정지에 의한 것이다. 의학용어에서 심장마비라는 말은 없는 듯하다.
왼손의 상처가 욱신욱신 아프다. 새끼손가락 뿌리부터 엄지손가락 뿌리를 향해 긁힌 상처가 비스듬히 달리고 있었다. 학원의 양호실에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데면데면한 응대를 받고 불쾌해질 뿐이다. 큰 상처는 아니다. 내버려두면 금방 딱지가 앉겠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화농 제거용 소독약을 발라 두기로 했다. 가져오지 않았기에, 기이가 남겨두지 않았을까 하고 벽장과 서랍을 찾았다. 모든 가구를 점검해 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거실 구석에 놓인 라이팅 데스크의 뚜껑을 앞으로 쓰러뜨렸다. 뚜껑은 필기용 책상이 된다. 속에 삼단 서랍과 얕은 책장이 만들어져 책 몇 권과 필기용구, 메모용지 따위가 놓여 있었다. 기이의 유품이다. 서랍의 제일 밑에 작은 열쇠구멍이 하나 있었다. 작은 손잡이를 당겨 보았지만 열리지 않는다. 주머니에서 열쇠 다발을 꺼냈다. 현관 열쇠 이외에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다른 두 개의 열쇠는 어디에 쓰는 건지 확인할 틈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작은 열쇠는 서랍의 열쇠구멍에 딱 맞았다.
노트가 들어 있었다.
모국어 문자에 그는 가슴 아플 정도로 그리움을 느꼈다.
그것도 기이의 필적이다…….
〈세 개의 선택지가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미나모라는 생도가 입에 올렸던 것과 같은 말이다.
그는 읽어나갔다.
〈철저하게 다할 것인가. 그저 보고 있을 것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통을 줄 것인가.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우리의 사랑(恋) 역시. 언제든 근본에 있는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이다. 다하는 것 또한 지배의 한 형태다.
억압당할 정도로 비대해지는 것이 욕망이다.
따라서 흉폭한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는 욕망과 함께 확대하는 영역이 필요한 것이다.
나의 욕망은 단지 증대한다.
신의 사랑(愛)을, 성서의 그리스어 원전은 아가페라고 하고, 인간의 사랑(恋)――육욕을 포함한 사랑――을 에로스라 부른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정반대의 두 감정을 포함한다. 신의 위대한 자애, 신에의 숭고한 경모(敬慕), 신의 사랑을 사람에게 퍼뜨리려 하는 무사(無私)의 헌신. 그것을 의미하는 아가페에 비해, 단지 자신의 욕망을 고집하여 그 벡터는 착란으로 향하는, 때론 야만적이기까지 하는 사랑(恋). 모두 사랑이라 불리기에 사람은 착각하는 것이다. 사랑(恋)이 존경스러운 사랑(愛)인 것처럼.
이 나라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60여년전 서구 열강에 의해 자물쇠를 굳게 건 문을 힘으로 파괴당할 때까지, 이 작은 섬나라에서는 사랑(愛)이라는 말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서구의 사상, 문명에 거의 접한 일 없는 작은 나라는, 독특한 정감표현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恋)은 옛날부터 있었다. 그러나 사랑(愛)은 부디즘과 함께 들어온 말로 번뇌를 의미하며, 또한 ‘카나시’라고 읽어서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에 가련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비라는 말이 아마도 형이상의 사랑, 아가페에 상당하는 것인 듯하다. 여기에도 가련하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자 이 나라의 사람들은 이국의 언어를 어떻게든 자기 나라의 말로 옮기려 했다. 아가페도 에로스도 포함한 서구의 ‘사랑’에는 恋도 愛도 뭉뚱그린 ‘戀愛’라는,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 붙여졌다.
나는 자신의 감정을 착각하지 않는다. 나의 ‘사랑’에는, 아가페의 한조각도 없다. 욕망 뿐이다.
도립(倒立:물구나무)의 감각을 알았을 때 나는 다섯 살이었던가, 여섯 살이었던가. 고아원의 경영자는 후원자의 욕망에 가능한 한 따르려 하고 있었다.
어릴 때였으므로 세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마차로 나무 다리를 건넜던 것은 확실하다. 화가와 나는 나란히 앉아있었다.
저것이 나의 아틀리에다. 화가는 그렇게 말하며 밖을 가리켰다.
황혼의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의 가지가 강물에 거꾸로 서서, 돌로 된 자그마한 이층집도, 살구빛 하늘을 비춘 물의 밑바닥을 향하여 거꾸로 서 있었다. 슬레이트 기와와 초가지붕이 혼재한 농가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가파른 지붕이 다락방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었다. 희미한 바람이 수면에 파문을 일으켜, 그림자가 일그러지며 흔들렸다.
낡은 목조 외계단이 이층 아틀리에로 직접 통하고 있었다.
높고 쭉 뻗은 등받이와 조각으로 장식한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무언가 스케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화가는 나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버튼을 풀고 셔츠를 벗자, 바지와 속옷도, 라고 화가는 눈으로 재촉했다.
어린 나에게 알몸이 되는 것은 아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의자 위에, 무엇을 그린 건지 모를 그림이 신경쓰였다. 쳐다보고 있자, 위아래가 뒤바뀌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하기 위해――멋대로 만지면 혼날지도 모르니까 ―― 나는 의자에 등을 돌려 양발을 벌리고 허리를 굽혀서, 다리 사이로 스케치를 보았다. 방 내부가 모두 위아래가 반전되어, 종이 위에 그려진 얼굴만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웃음소리를 들었다. 전라가 된 화가가 의자 곁에 등을 돌리고 서, 나와 같은 모습으로 다리를 벌려 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종이 위의 얼굴은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스케치가 화가의 자화상이라는 것은 명백히 이해되었다.〉
사람의 기척이 난 기분에 그는 노트로부터 눈을 들었다.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창 밖에는 그에게 상처를 입힌 넝쿨장미가 황혼에 녹아들고 있었다. 반대쪽의 작은 창은 지는 해를 숨긴 저녁 구름이 비둘기 무리처럼 술렁였다.
그는 기이의 노트로 시선을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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