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야오이를 하는가/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⑴

  나카지마 아즈사의 야오이 심리/문화 평론 [타나토스의 아이들]을 읽다가, 격심히 찔리는 부분이 있어 옮겨 본다.
  이 포스트의 인용문과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포스트에서도 왠지 모르게 엄청난 찔림(이번에 옮기는 부분의 표현에 의하면 일종의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를 느꼈다. 이번에도 가차 없을 정도로 꿰뚫려 버리고 만다.
  "야오이"와 그것을 향유하는 오토메의 심리에 대한 에세이이지만, 단순한 (재패니즈) 엔터테인먼트 노블 독자로서 읽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니 다 떠나서 그냥 개인적인 '나' 라는 인간의 지극히 나약하고 방어적인데다가 갈피 주체 못하는 심리 하나에 기반하고 읽어도 충격이 크다.
  강조표시는 책의 방점 부분을 따랐다.

 (제 1장 '사람은 왜 야오이를 하는가' 그 9 에서 이어짐)

  그래서, 야오이.
  야오이 또한 할리퀸 로맨스 중독과 같은, 그리고 그것보다도 아마 더 많고 더 눈에 띄는 판타지 의존증의 한 증례이지만, 이제 이렇게 단언해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야오이에 있어서의 판타지, 야오이 의존증이 되어 남녀의 이야기 따위가 잘 읽히지 않고, 야오이 만화나 소설이나 잡지만 찾아 읽고, 만사를 야오이적으로 읽어내며 기뻐하고, 천랑 파티오(*저자 나카지마 아즈사 aka 쿠리모토 카오루의 오피셜 사이트)에 들어와서 이 야오이야 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는(폭소) 사람들이 그렇다면 "어떤 판타지를 구하는 것인가" 라는 것.
  그것은 곧, "디스커뮤니케이션의 판타지" 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부를 분석해 가면 야오이가 집요하게 반복하고 있는 그것들의 패턴, 강간으로 시작해서 러브러브가 되고, 우케가 일단 한번 사정한 후 세메가 A-SEX(*anal sex)에 이른다는 그 패턴, 그것은 모두가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승인"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슬슬 이야기가 점입가경이 되어 가는군요.

  [제 2장 다정한 디스커뮤니케이션 증후군]

  ●그 10

  자, 슬슬 이 미덥지 못한 평론도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네, 야오이란 "디스커뮤니케이션의 판타지"이다, 라는 것.
  야오이는 많이 그 관계가 "강간으로 시작된다" 거나, "강간으로 끝난다"거나 합니다. 하지만 왜 합의로는 안 될까요? 동성끼리라면 더더욱 원래부터 합의로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는 기분이 듭니다. 호모와 호모는 눈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가 동류임을 안다고 합니다. 동류가 아닌 사람을 정말 힘으로 강간하면 그거야말로 형사사건이지 않을까. 강간당한 자신이 호모였다, 또는 남자와 섹스하는 것도 싫지 않았다거나 혹은 강간한 상대를 사랑한다고 발견하는 남성이란 일단 그렇게 많지 않잖은가(여성이라더라도 그렇게 많지 않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더라도 가끔은 강간이 아닌 인연의 시작이란 것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됩니다. 물론 가끔은 있지만, 그것이 비상히 흥미롭게 여겨지는 것은, "강간이 아닌 섹스관계의 시작"을 그리는 야오이 만화가들은 거의, 다른 "보통 만화" 즉 남녀의 섹스와 연애를 제대로 그리는 만화도 그리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그 후에도 일방적인 인터랙티브성을 결여한 섹스패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디스커뮤니케이션이라도 좋지 않은가. 디스커뮤니케이션이 뭐가 나쁘냐" 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따위 하고 싶지 않아, 안 해도 돼" 라는 것입니다. 극히 단적으로, 난폭하지만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나는, 사실은, 야오이가 "남자들끼리" 인 것은, 그런 이유가 꽤 크다고 생각합니다. 남녀관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질적인 것들끼리"입니다.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는 이질이고, 다른 문화의 인간이고,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남녀 사이에서 강간이 있고, 일방적인 섹스가 있어도 그것은, 당연하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어쨌든 "뭐어, 그런 게 있지"라고 말할 만한 일입니다. 랄까 일본의 남자는 쭉 기본적으로 "일방적인 섹스"를 해 왔고, 감히 말하자면 얼굴도 모른 채 부모가 정한 남편에게 시집간 여성도, 자신이 하고 싶은가 아닌가와 관계 없이 남편의 요구에 응하는 아내도, 특공대원이 "자손을 남기기" 위해 색시로 맞은 여성도, 그것은 이미 모두 어떤 의미에서 강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오시마 나기사가 그것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사랑의 코리더"같은 영화를 찍은 것도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쨌건 남녀의 성이라는 것은 원래부터가 異物끼리이기에, 그렇기때문에 역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지극히 중대해집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없으면 일절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상한 어법입니다만. 랄까 남녀라는 것은 전혀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들끼리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지 않는 한 커뮤니케이션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남녀의 사이에 있는 디스커뮤니케이션은 결국에는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거부" 입니다. 지극히 의도적인 디스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러나 야오이의 경우는, "남자와 남자" 입니다. "동질의 것"입니다. "동류" 입니다. 본래 이질적인 존재인 여성이, 자기자신을 굳이 그 창작세계로부터 배제하여 "동질의 것끼리"의 관계성을 그립니다. 또는 그것을 구합니다. 여기에 제가 아까 말한, "혼자만의 고독한 디스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두사람 단위, 커플단위로 망상된 디스커뮤니케이션으로" 라는 전개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강간은 남녀 사이에서 행해지면 한쪽에 의한 한쪽의 지배이고, 복종이며, 최악으론 종족유지본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자들기리의 경우엔, 강간은 하는 쪽에 의한 "나는 이렇게 널 원해" 라는 의사표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가령 그것이 상당히 폭력적이라도 하더라도 "남자라는, 본래는 섹스의 대상으론 되지 않는다는 최대의 핸디캡을 가진 상대" 를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섹스해버릴 정도로 원한다" 라는 현상으로서, 쓰는 쪽이 아닌 읽는 쪽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케 또한 그런 강간이 있을 때, "그렇게 나를, 남자라는 최초부터 사회적 룰로부터 일탈한 상대인 나를, 그렇게까지" 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만약을 위해 말해두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야오이 월드 속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의 남성의 이야기가 아니랍니다(웃음)). 강간 자체에 대해선 화를 낸다더라도, "강간"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이 "의사표시"로서 받아들여집니다. 아니, 남성은 곧잘 "나는 그래" 라고 오해하여 여성을 강간하지 않더라도 무리하게 주장하곤 하여 격노를 사곤 하지만, 그것은 남성 쪽은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이 의사표시이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버리고, 한편 여성 쪽은 상대 남성에 대해 전혀 아무런 관심도 없거나 하면, 의사표시고 뭐고 "너 같은 거 남자라고 생각한 적 따위 없다고!" 가 되고 맙니다. 남성은 "의사표시로 충분히 전했다"고 생각하고, 여성은 최초부터 "너따위 대상 외"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런저런 희비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중략: 레이디즈 코믹스의 일례로, 전혀 남자로 보지 않던 친구에게 강간당한 후 그와 가정을 꾸리는 결말을 맞는 여자의 이야기. 그녀는 결혼 후 무난하게 살지만, 가끔,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이렇게 잘 살다니, 그때 내가 느꼈던 분노와 치욕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칼을 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고 독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의 이야기이니 이런 "좋아하는 여자를 강간하면 뒷일이 나빠요" 라는 교훈에 찬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만약 남자와 남자의 이야기로, 야오이의 이야기라면, 결코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강간당한 우케는 "정말로 널 좋아한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어"라며 그 후엔 해피엔딩 러브러브가 되겠지요. (중략)
  이야기가 엇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야오이는 "강간"을 "사랑해"로 번역하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하고 싶어" 를 "네가 좋아", "남자라도 좋아" 를 "네가 너이기 때문에 좋은 거야"라고 번역하는, 그런 판타지의 언어입니다. 이물인 "여자"가 들어가면, 이물과 이물의 충돌로서 당연히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언어가 필요해집니다. 하지만 동질의 것끼리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라는 것이 야오이의 판타지입니다. 강간한 쪽은 그대로 미끌미끌 우케의 체내에 받아들여지고, 범해져선 안 될 곳을 범해진 우케는 그대로 난입한 페니스를 삼켜버리고 강인하게 소화하여 균질화시켜 버립니다. 어묵(폭소)은 아니지만 거기서 "일단 우케를 사정시킨다"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너도 기분 좋았으니까, 이번엔 내가" 라는 "서로서로 사상"이 성립합니다. "사이 좋게" 라는 거죠. 이물이 아니니까. 강간이라는 궁극적인 지배피지배관계에 대해서도 서로서로 사이 좋습니다. 자신이 하려고 한다면 범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므로 이것은 "약속". "아프기만 하면 불쌍하니까 일단 기분 좋게 해 줄게" 라는 대사, "미안, 기분 좋은 것만이 아니라서"(우치다 카오루) 라는 대사가 보이는 것과 같이, "우케를 일단 보낸다"는 것은 이 약속의 교환행위. 고다카 카즈마의 "키즈나"에서 "영원의 우케" 란마루가 "부부싸움"을 하여, 강간이나 다름없이 연인인 케이에게 당할 뻔하자 열받아서, 위에 올라타고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라고 말합니다. 케이는 당황하여 "으악, 내가 우케냐" "안돼, 당한다. 이제까지의 위엄이..."라며 떱니다. 그러자 결국 란마루는 기승위로 자신이 우케를 하고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바보 자식"이라는 결말이 됩니다만, 그러므로 남자니까, 남자이기 때문에 사실은 우케하지 않고 세메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케라는 것은 약속. 네, 이 약속이야말로 디스커뮤니케이션의 판타지입니다.

  ●그 11

  남녀 사이에서는 이 약속이 거의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물이니까요. 남자는 지켰다고 생각해도 여자는 "약속이 달라"라고 생각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판타지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같은 것들이 둘"있다면 그것은 판타지가 될 수 있습니다. 디스커뮤니케이션은 기본적으로 단 한사람 자신에 틀어박혀 버려, 다른 시점이나 사고방식을 거부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당연하게도.
  고독하니까, 디스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나와서 커뮤니케이션하자, 인간관계를 지키자, 라고 생각하는 것이 통상의, 뭐 말하자면 건강한 인간입니다. 제가 "커뮤니케이션 부전증후군"에서 묘사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의미로든 어덜트 칠드런, 학대받은, 혹은 당사자가 "학대당했다는 의식 혹은 무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이 무섭습니다. 랄까 일단 "어차피 이해해 주지도 않아" 라는, 세계에 대한 비상히 강렬한 고독감을 무의식적으로라도 갖고 있습니다. 이해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더욱 많이는 이해하기 위한 타협을 하는 것을, 그들은 "자기를 침식당하는"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라고 감지합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확립해야 할 유소년기에 어떤 원인으로 소외당하여, 그들은 자아가 다른 사람들보다 약하거나, 끊임없이 위기에 봉착했거나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상히 자아를 지키는 일에 대해 델리케이트해지고, 완고해지고, 강렬해집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많거나 적거나 다른 자아와의 부딪침에 의한 타협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부딪쳤다가는 자신이 부서진다, 라고 비상히 확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온갖가지 디스커뮤니케이션의 바위 속에 틀어박히게 됩니다.
  프루스트의 "코르크 방(*프루스트는 만년에 외계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벽에 코르크를 바른 방 안에서 집필했다 : 저자 주)" 이라는 선례는 너무 고전적이지만, 아니패로(*애니메이션 패러디), 코미케, 야오이, 성우팬, 그런 사람들은 배상히 강력하게 "같은 언어"로 말하고 같은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신"들과 밖에는 교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호모 동류 눈과 눈이 맞으면ㅡ이라고 할까 한가지 "갓챠맨(*즉 '독수리 오형제'-_-) 좋았어!" "응, 죠랑 켄(*독수리 오형제의 1호기-_-와 2호기-_-횽아의 이름)!" 이라고 말하면 그걸로 모두가 성립하는, 다른 자아가 없이 공유의 판타지 공간을 보유하려 합니다. 호모가 같은 호모 속에서까지 비상히 특수한 성적 기호를 공유하는 상대와밖에 섹스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 디스커뮤니케이션 종족은 "디스커뮤니케이션으로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와밖에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일상적으론 보통으로 대화도 하고 일도 하지만, 인격의 기반, 자아의 근간은 그런 비밀스런,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가 결코 없는 판타지 공간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니패로 동인지의 세계를 보면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상냥하고, 그리고 정중하고 친근합니다. "뭐시기 씨, 고마워요!" "이렇게 멋진 게스트를 맞게 되어서 저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이 XX의 그림은 뭐시기 쨩에게 선물" "XX씨, 이번에 XX씨의 뭐시기 버전을 그려 주세요" ㅡ 문예동인지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그린 "화전문예"의 세계(*쓰쓰이 야스타카의 소설 "위대한 助走"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동인지 : 저자주), 장절한 욕 주고받기, 상대의 자아를 붕괴시켜버릴 정도로 엄청나게 격렬한 매도와 문학론이 날아드는 세계입니다만(전에도 시부야의 야키토리 집에서 옆 테이블에 완전히 "화전문예"의 일동 여러분 같은 50대 정도 되는 문예동인지 뒷풀이 중인 여러분이 계셔서, 거기서 주고받는 서로의 작품과 인격에 대한 악담과 매도와 공격이 너무 엄청나서 이쪽 일동이 숙연하게 귀를 세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니패로 동인지, 야오이 동인지의 세계에선 "뭐어야, 데셍도 안 되는 하수가" "그림 엉망이다" "레벨이 너무 낮아" 같은 것은 생각해도 결코 입밖에 내어 지지 않는(폭소) 여러분들은 거의 모두가 가련할 정도로 상냥한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칭찬해 주고, 자부심을 다정하게 구제해 주빈다. 아무리 그렇게 칭찬해 준다고 상당히 심각한(때로는, 지독한) 그림 레벨인 사람이더라도 "이걸로 좋아, 나는 꽤 잘 해" 라고 몰래 생각하며 계속 그리게 되므로, 그러니까 그 3호 잡지가 짜증날 정도로 그런 "작품"으로 가득 차는 거잖아? 라고 그다지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사도라곤 말할 수 없는 저는 몰래 잔혹한 생각을 합니다만, 그걸로 좋은 겁니다. 그들은 상업지, 커머셜리즘의 강렬한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도태의 세계 참가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야말로 디스커뮤니케이션 종족이니까요. "자신의 진짜 레벨, 힘" 세계에 있어서 자신이 얼마만한 존재인가, 따위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이 얼마나 별볼일 없는지, 얼마나 세계에 있어서 변변찮은 존재인지, 라는 것은 줄곧 아플 정도로 통감해 온 것이 그들이니까. 그러므로 "그런 것은 알고 있어. 그런 건 이제 됐어. 그런건 이제 필요 없어" 입니다. 그들은 다정한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세계에 겨우 "자신의 장소"를 찾아낸 것입니다. 어른의,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요구하며 그것이 없으면 깨끗이 내동댕이쳐지는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이 "만다라케"의 구석의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세계에 겨우 안심과, 연약하고 상처입은 자신을 달래고,  잠시 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제 이물은 결코 필요 없습니다. 이물 따위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녀간의 너덜너덜한 망집이나 확집, 격렬한 싸움이나 요구 따위 이제 절대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 자신을 도태시키고 괴롭히고 상처입히고 내동댕이친 세계의 상징입니다.
  이물은 필요 없어. 동질인 것, 균질의 우주, 결코 이질이 되지 않는 자궁 속에서, 결코 진정한 싸움이 되지 않고 결코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위협하지 않는 판타지 속에서 잠들고 싶다. 하지만 혼자는 외롭다. 하지만 "여성끼리"는 싫습니다. 어째서? 여성이야말로 그들에 있어서 기본적인 라이벌이며 그들은 여성을 차별하고 지배하는 남성사회의 논리 속에서 상처입어 온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선별당한는쪽 끼리는 사랑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더욱 말하자면 자신과 정말로 동질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약 있다면 자신이 자신일 수 없게 되어 버리니까. 그리하여 같은 종류 상대라거나 우열이라거나, 그런것을 선별하는 무엇이 나옵니다ㅡ우열을 정해지는 것,경쟁원리의 사회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여 저 다정한 "XX선생님, 바쁘신 중에 고마워요! 다음에 어시스트하러 갈게요"의 세계를 만든 그들이, 어째서 다시 좋아라고 일부러 경쟁원리의 상징을 자신의 판타지 속에 끌어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소년, 이라는 존재를 가상합니다. 여자의 상냥함과 남자의 보호애를 겸비한 존재를, 남자의 주체적 욕망과 여성의 받아들이는 쾌락을 함께 갖춘 존재를 가정합니다. 그리고 그 "소년끼리" 사이에서 커플 단위의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코르크 방을 만들때, 겨우 그들은 안심합니다. 강간조차도 다정하게 받아들여져ㅡ자신을 상처입히려 하는 인간관계는 "사랑" 속에 수습되어 녹아 갑니다. (중략 : 이시하라 사토루의 만화 '넘칠것 같은 풀'의 케이스에 대한 언급)
  강간하려 하는 상대조차 사실은 약하다, "여자애" 인 거다(는 지문이 나온 건 아니고 이는 제 자의적 번역입니다만)는 걸 알았을 때 우케는 세메의 강간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려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에 의한 지배"를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강간하는 쪽은 강간할 정도로 자신을 구하고 있다, 고 우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용서할까 말까, 받아들일까 말까는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 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부드럽게 우케와 세메는 서로 다가가고, "약속"의 세계로 이행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마음 속에 넘칠 것 같은 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 지켜주고, 보듬어주고, 다정하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네, 이것은 매우 다정한 디스커뮤니케이션입니다. 하지만 디스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약자의 히로익 판타지"입니다. 누구라도 마음 속에 넘칠 것 같은 풀이 있어, 그러니 그것을 넘치게 하는 게 뭐가 나빠, 받아들여 주길 원해, 맞부딪치고 싶어, 라는 식으로는 그들의 논리는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 풀을 공유하고 하나가 되고 싶어, 라는 것이, 두 개의 각각의 풀이 다정하게 섞여서 하나의 풀이 되는 것이 그들의 최종적 바람입니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타인이 얼마나 자신과 다른 존재인가" 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충돌입니다. 그들은 그 충돌도, "타인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싫어, 라고 표명하고 있습니다. 충돌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멋대로 이 판타지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 여기로 오지 마, 이 세계에 관계 없는 인간은 관계 없어, 라는 것이 무의식적이더라도 그들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판타지 세계 시스템 언어는 비상히 얽히고 섥혀 있습니다. 그것이 앞서 말한 여러가지 패턴입니다. 물론 "우케가 한번 사정하고..."가 아닌 패턴의 섹스도 있습니다. 야마아이 시키코 씨의 소설에선 우케가 전혀 사정하지 않고 A-SEX당할 뿐, 이란 것도 많고, 칸자키 하루코 씨처럼 완전히 SM적인 것도 있습니다. 또 완벽히 러브러브 할리퀸적인 섹스도 물론 하나의 장르로 형성될 정도로 일대 세력으로서 뿌리가 깊습니다. 그것은 야오이를 하는 소녀들에게 있어서 무당벌레 등의 반점으로 종족을 구별하는 것처럼, 패턴 인식에 의해 "정말 좋아하는 타입"을 찾아내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지만 기본은 딱 하나. 그것은 "당신들(어른)의 논리는 이제 필요 없어. 당신들의 커뮤니케이션도 이제 필요 없어. 우리(들)은 우리 좋을 대로 이 닫혀진 세계에서 해나갈 테니까 내버려 둬" 라는 것입니다. 그 논리와 그 커뮤니케이션이 우리들을 상처입혔으니까, 이제 우리들은 그곳에서 내리겠어, 라는 선언입니다. 이 평론을 읽고 "아냐. 전혀 아냐" 라고 느끼는 야오러도 다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문장 역시 어른의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쓰는 내용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발명된 언어를 사용하여 쓰고 있다, 는 것만으로도 이미, 디스커뮤니케이션 판타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건 "아냐"입니다. 그들은 그런 언어에 의해 상대와 충돌하거나 복종하거나 하는 시도에야말로, 등을 돌리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진짜 솔찍히 까놓고 말해서, 엄청 충격을 받았다. 와, 완전 내 얘기야!!
  [타나토스의 아이들]은 98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것인데, 본문의 글 자체는 나카지마 여사의 오피셜 홈에서 연재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럼 더 오래 전에 썼다는 얘긴데.
  내가 시대에 엄청나게 뒤쳐진(...) 거냐, 여사의 선견지명이 대단한 거냐. ...둘 다겠지만.

  나는 사실 야오이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본 적은 없다. 내 야오이 향유 패턴은 말하자면 오타쿠가 아닌 남자가 야한 것들을 공수하는 패턴이랑 비슷하다. 그냥 적당한 데서 다운받고 보고 지우면 끝이다. 사람들과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야오이 네타 가지고 들뜬 일도 별로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호모게이" 라거나 "후로게이" 라는 단어의 사용처럼 장난, 이랄까 풍자, 혹은 스스로에 대한 냉소가 안 들어간 적은 없었다. 
  위에서 여사가 분석한 것과 같은 야오러의 디스커뮤니케이션성은 야오이 쪽이 아닌 소설 쪽에서 충족하려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중성적인ㅡ라기보다 굳이 말하자면 남성향적인 소설(주로 엔터테인먼트 계)쪽의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야오이 취향을 드러내고 그걸 스스로의 캐릭터로 삼았다는 점이다. 야오이 커뮤니티에서 마음껏 드러내고 살면 될 스스로의 야오이 요소를, 어째서 소설 사이트에서 캐릭터화하며 활동했던 걸까. 그래 봐야 절대로 충족되는 일도 이해받는 일도 없이, 별로 효과적이지도 않을 캐릭터 만들기로 그쳐 버리게 될 것을.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론 내가 가진 야오이 판타지의 패턴이, 주류의 그것과 상당히 어긋난다는 점이다. 주류란, 말하자면 BL이다. 보이즈 러브, 라고 읽고 소년들 간의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연애물을 이르며, 가끔은 그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한 채로 중년이나 리맨 등의 중장년층 캐릭터로 소화되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쪽의 기본적인 정서는 연애에 대한 달콤한 환상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서로 혹은 일방적으로 귀여워해 주기. 개중에는 상당한 SM물, 능욕물, 조교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귀여워해 준다' 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단적으로 말해 세메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케를 '귀여워하는' 대사 혹은 행동을 하고, 우케는 엄청나게 귀여운 혹은 아양을 떠는 대사 혹은 행동 하며 의사 소통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세메와 우케의 언동을 볼 때마다 닭살이 돋고, 때론 불쾌해져서 도저히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게 된다.
  어째서인지 서로/세메가 우케를/가끔은 우케가 세메를 '귀여워하는' '아양떠는' 감정에 도저히 이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샌가 미간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이렇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해 버리고 만다. "이것들은 사지 멀쩡해 가지고, 어째서 싸우지 않는 거야? 좀 서로 쥐어 패란 말이다. 얌마 너, 이 우케 자식, 그따위 짓을 당하고도 열받지도 않냐! 주먹을 써 주먹을! 세메 너 이자식은 저딴 비리비리한 우케놈의 어디가 좋은 거냐! 기껏 남자를 좋아하는 주제에 좀더 하드코어한 녀석에게 반하란 말이다! 반해서 서로 스탠드배틀이라도 하란 말이다! 피로 피를 씻으란 말이다! 살을 주고 뼈를 치란 말이다!" 뭐 이런 식으로 상당히 삐뚤어져 있다. 굳이 말하자면 모토니 모도루 쪽의 괴이쩍은 비엘계 배틀물(....)과 통하는 종류랄까. 아, 그렇다고 바키 같은 격투만화를 보며 모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림이 아름다웠으면, 아마 모에했을 지도 모른다. 극한의 마초이즘 남성향 만화가 표현하는 상황은 솔직히 내가 가진 어떤 판타지와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남자가 바키를 볼 때 충족되는 판타지와 내가 그것을 볼 때 어쩌면 이것은, 하고 느끼는 무엇이 일치할 리는 없고, 뜯어보면 놀랄 정도로 판이할 것 같지만. 근데 모토니 모도루가 그림을 그린 '바키'라면 엄청나게 꼴릴지도
  어째서 '사랑'이라거나 연애라거나 '귀여워하기'가 아니라 폭력 쪽으로 리비도가 쏠리는 건지, 나도 모른다. 뭐 아주 억측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되면 엄청나게 비참한 결론이 나와 버린다. 난 어째서 이딴 쎾쓰판타지 따위에서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라고 서글퍼서 울고 싶어진다. 여하튼, 주류와 나는 그야말로 디스커뮤니케이션의 골이 깊게 파여 있다. 아마 그쪽은 이쪽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도 그쪽이 잘 이해가 안 간다. 따라서, 야오이계라는 협소하지만 나름대로 오손도손 지내는 도피처조차 이쪽에게는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그 대신, 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나마 내가 숨어들어갈 만한 도피처가 소설 쪽의 커뮤니티였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숨기고 한숨 돌리면서, 커뮤니티 자체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거다. 그 '어리광'이야말로, 저 쪽에서 충족되지 못한 야오이 기호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 마음 편하게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나름대로 줄다리기를 하면서. 숨길 것, 드러내도 좋을 것, 취해도 되는 형식,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될 형식, 이런 것들을 무의식적이건 일일이 계산하며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 커뮤니티는, 대놓고 여성향을 지향하는 곳이 아니면, 기본적으론 어디까지나 남성향적이다. 즉 야오이 판타지를 가진 인간이 숨어들기엔 너무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장소인 것이다. 그것도 나처럼 그바닥에서조차 비주류인, 지극히 굴절된 종류의 인간이라면 더더욱.

  나카지마 아즈사의, 위에서 인용한 단락까지에선 사실, "디스커뮤니케이션"의 환상공간을 지향하는 심리에 대한 이유는 상당히 나왔지만, 그 공간이 왜 하필 지극히 성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왜, 저 아름다운 소녀들이 날개를 접고 웅크리는 곳이 하필이면 쎼...쎾쓰! 따위로 점철된 공간이어야 할까. 또는 나는 왜, 지극히 중성적이고 이성적인 소설 커뮤니티에서 쉬면서, 굳이 쎼...쎾쓰! 판타지와 관련한 요소를 충족시키려고 한 것일까. 그래야만 할 필요가 도대체 어디에 있나. 이것은 흥미 깊은 문제이지만 섣불리 건드리긴 거시기하고. 일단 책을 좀 더 읽은 후에 생각해 봐야겠다. 아직 반의 반밖에 못읽었으니;
  그보다는 어째서 스스로의 디스커뮤니케이션성을 소설 쪽에서 충족시키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그지경까지 되었는지(...안습)를 이 단계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사실 이게 본론인데 글이 엄청 길어졌근영. 다음 글로 넘겨야겠다. 강조하건대, 나카지마 여사가 "왜 사람은 야오이를 하는가" 를 분석한 심리적인 이유와 나 스스로 "왜 난 소설을 읽는 걸까"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상당히 일치한다. 그 키워드는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다.

by 올리비아 | 2008/07/08 20:53 | 穢れよ。乙女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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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文學美靑年's Birt.. at 2008/07/29 02:34

제목 : 한밤중은 열폭
아. 아 정말 진짜 까놓고.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정말로. 누가 "님은 누구세요?" 라고 물으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식은땀부터 뻘뻘 흘릴 것 같아. 이름이라거나 좋아하는 음식이라거나 소속 학교학과라거나 그런 것들을 열거할 수는 있는데, 그게 뭐? 그게 다? 란 기분이 되어 버려. 님은 누구? 여긴 어디?&nbs......more

Commented by 븐루 at 2008/07/08 23:33
가끔 올리비아님 이글루에 들러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만 이번 글은 정말 저까지 치유해 주시는군요T_T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올리비아 at 2008/07/09 19:29
도움이 됐다니 저야말로ㅠㅠ 이게 다 나카지마 여사님 은공입니다.
Commented by 니룬 at 2008/07/09 04:40
성적인 부분이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그래서 강렬한 본능이라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밸리에서 보고 왔습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Commented by 올리비아 at 2008/07/09 19:30
안녕하세요! 방문 감사합니다.
이후 책을 읽다 보니 왜 하필이면 성적인 영역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점점 나오더군요; 이부분은 좀 더 읽은 후에 정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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